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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호 유럽 진출 골키퍼' 권정혁, 무한도전의 삶을 디자인하다 (2편)

2020.09.07

 

"처음 숙소에 가는 날이었어요. 이름만 듣고 고려대 축구부 숙소라고 하니까 완전히 기대에 부풀었죠. 숙소에 딱 도착을 했는데, 가자마자 쥐가 나오는 거예요(웃음). 당시엔 숙소가 지금의 녹지가 아니라 이공계 캠퍼스 쪽에 있었거든요. 시설도 열악했고, 심지어 세탁기도 없었을 때니까요. 축구부도 축구부지만, 야구부 선수들이 빨래를 참 많이 했어요. 최희섭(법학98, KIA 타이거즈 코치) 선수도 야간 운동을 하다 와서는 선배들 빨래를 12시까지 하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 제가 키가 크다 보니 농구부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웃음). 유독 현주엽(경영94) 형이 제게 짓궃게 장난도 많이 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프로 생활할 때 호텔 등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그때 이야기도 하고 그랬죠.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5개 운동부 선수들끼리 교류가 꽤 많은 편이었던 것 같아요.“

'히딩크호 멤버', 하지만 프로에서는 줄곧 '세컨드 골키퍼'

 고려대 졸업 후 울산에 입단한 권정혁은 2002년 초 월드컵을 앞둔 히딩크호에도 선발, 북중미 골드컵 명단에도 이름을 올릴 만큼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어떤 팀에든 단 한 명의 자리밖에 없는 주전 골키퍼의 자리는 가깝고도 먼 꿈이었다. 그해 신인임을 감안하면 10경기를 넘게 소화하며 나름의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이내 후보로 밀려나야 했고, 상무 전역 후에는 정성룡(가와사키)과 신화용이 버티는 포항스틸러스, 이후에는 김호준(체교03, 부산아이파크), 김병지 등 쟁쟁한 골키퍼 진을 보유한 FC서울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처음 울산에서는 김병지 선배의 이적 이후 경쟁 구도였기 때문에 제게도 기회가 좀 왔어요. 2002년도에는 국가대표 B팀에는 계속 선발되면서 미국에서 열린 골드컵도 다녀왔고요, 생각해보면 그때가 정점이었고, 이후로 계속 내리막길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죠. 소속팀이 계속 잘했으니 선수로서 승승장구하며 프로, 국가대표까지 했지만, 어떻게 보면 당시엔 아직 기량이나 내실이 선수로서 미완성이었던 것 같아요. 또 그렇다고 팀에 아예 필요가 없는 선수는 아닌 애매한 상황이라 더 힘들었죠. 두 번째, 세 번째 골키퍼는 항상 필요하니까요."

 팀의 '세컨드 골키퍼'로서 스쿼드를 해우기만 하는 생활이 계속되면, 자연히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전 골키퍼의 부상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출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에, 상황에 안주하거나 무력감에 빠지기도 쉽다. 하지만 권정혁은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해결책과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경기를 뛰진 못했지만, 그 시절 계속 기본기를 익히면서 선수로서 '내실'을 쌓고자 노력한 것 같아요. 제가 부족했던 부분도 채울 수 있었고요. 좀 웃긴 얘기 같을 수도 있지만, 제가 골키퍼인데도 킥을 잘 못 찼어요. 폼도 엉성하고 90년대까지만 해도 스위퍼가 골키퍼 대신 골킥을 차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거든요. 안 해 버릇하면 발전이 없다고, 그래서 그때 킥 연습을 참 많이 했어요. 훈련 후에 항상 2~30분씩 남아서 혼자 킥 연습을 하는 게 루틴이 돼버릴 정도였으니까요.“

 어릴 적 위성중계로 유럽리그 경기를 보며 막연히 소망했던 '해외 진출'의 꿈을 권정혁이 조금씩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고려대 시절부터 익힌 영어에 대해, 프로 진출 후 포르투갈어까지 익히는 등 언어와 문화에 대해 감각을 습득하기도 했다

 "영어 같은 경우는 대학 시절 '실용 영어' 라는 과목을 4학년 때 까지 계속 재수강을 하면서 익혔어요. 학원을 갈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수강한다고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골드컵 당시 미국에 있다가 우루과이에 들렀어요. 미국에서 몇 마디 하다 보니 '영어를 할 줄 아는게 중요하구나' 느꼈는데, 또 우루과이에서 영어가 안 통하고 스페인어를 쓰는 거 있죠? 당시 히딩크 감독님께서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도 정말 유창하게 잘하셨어요. 그걸 보고선 저도 한국에 돌아와서는 경기를 뛰는 것도 아니겠다. 여유가 좀 있으니 브라질 친구들이랑 친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포르투갈어를 배운 것 같아요. 제가 하나를 말하면 그 친구들이 반대말을 알려주고 하는 식으로 금방 배웠어요. 나중에는 놀러 갈 일 있으면 통역이랑 저를 함께 부를 정도였죠." 
 

위기 끝 얻은 기회, 한국 최초의 ' 유럽파 골키퍼'가 되다.
 



 

상무 전역 이후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던 권정혁은 FC서울 이적 이후 에이전트를 통해 본격적으로 팀을 찾았다. 50여 개 팀과 접촉이 있었고,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눈 건 10팀 내외였다. 여름과 겨울 이적 시장 기간 계속 시도한 끝에 마침내 향하게 된 곳은 핀란드 1부 리그 소속의 로바니에멘 팔로세우라. '한국 최초의 유럽파 골키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쉽게 팀이 구해지진 않았어요. 하지만 이적 시장에서 제가 파는 상품을 저 하나기 때문에, 수많은 기회 중 딱 한 번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죠."

  

 골키퍼는 팀원들과의 소통이 매우 중요한 포지션이다. 수비진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라인을 유지하고 상대 공격수를 견제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언어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권정혁 이후에도 유럽에 진출한 골키퍼가 많지 않았던 이유이다.

 

 "핀란드에선 웬만하면 다들 영어를 잘하거든요. 다만 처음 갔을 때는 심리적으로, 혹은 팀 분위기에 적응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때 한국에서 배워둔 포르투갈어가 도움이 됐죠. 팀원 중에 브라질 선수가 딱 한 명 있었거든요. 저와 동갑이기도 해 친하게 지냈는데, 그 친구는 제가 포르투갈어를 하니까 거의 '동포'같은 느낌이었나 봐요(웃음). 생활면에서나, 팀 분위기에 적응하는 데 참 도움을 많이 줬죠."


 기회를 찾아 핀란드로 왔지만, 경쟁은 불가피했다. 처음엔 들쭉날쭉 출장 기회를 얻은 권정혁은, 잠깐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내 주전 골키퍼의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리그 하위권 팀이었던 팔로세우라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중위권 팀 VPS바사로 이적한 뒤, 2010년에는 '리그 베스트11'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헀다. 그야말로 '반전 드라마'를 쓴 시기였다.


3편 계속됩니다.


유승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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