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혁(신문방송학과 97학번) 스포잇 대표 인터뷰】
공부욕심 있는 운동선수
핀란드에서 제2의 인생 찾아
은퇴선수 자립에 디딤돌 되고파
권정혁 대표는 "젊은 은퇴선수들이 사회에 적응하는데 도움을 주고싶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 축구선수가 프로선수로 뛸 확률은 0.8%. 그중에서도 주전을 차지할 확률은 0.18%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학생선수로 훈련받는 선수들 대부분은 그라운드 바깥의 삶을 준비하지 못한다. 젊은 나이에 은퇴한 선수들이 대개 구직에 어려움을 겪는 게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현주소다.
이 문제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있다. 한국 최초의 유럽 무대 진출 골키퍼이자, K리그 최초의 골키퍼 필드골과 역대 최장거리 골 기록 보유자, 권정혁 교우다. 그는 은퇴선수들의 자립을 돕는 스타트업 ‘스포잇’의 대표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유니폼을 벗은 축구선수가 그라운드를 떠나 창업을 택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축구장, 강의실, 도서관, 다시 축구장
“제가 좀 독특했어요. 아마 축구부에서 저만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대학 시절 그의 하루는 늘 두 배로 빽빽했다. 새벽공기 마시면서 달리고, 1교시부터 강의 듣고, 오후에 도서관 가서 과제하고, 밤에 돌아가서 운동하면 다시 별이 보이는 새벽이었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즐거웠어요. 그땐 젊어서 에너지가 넘쳤으니까.”
체육교육과가 아닌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한 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운동선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다른 공부도 좀 열심히 해놓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신방과는 영어와 수학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서 그나마 쉽게 따라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현실은 냉정했다. 청소년 대표로 뛰었던 새내기 시절엔 점수가 바닥을 쳤다. 오기가 생겼다. 레포트 쓰는 법을 익히고, 무작정 하던 시험공부도 더 철저하게 준비했다. 조금씩 따라붙던 학점은 4학년 1학기 때 3점 초중반의 성적까지 찍었다. 운동과 학업을 병행한 것 치고는 굉장한 성과였다. 짜릿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연전 승리가 주는 뿌듯함은 성적 상승 그 이상이었다. 2000년 고연전은 그의 축구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다. “연세대한테 세 번 연속으로 졌어요. 1학년 때는 경기를 못 뛰었고, 2, 3학년 때는 경기를 뛰었는데 다 진 거예요. 그때는 정말 ‘이번에도 지면 안 된다’면서 마음 졸이며 준비했던 것 같아요. 30년 동안 축구를 했지만, 그 경기만큼 긴장됐던 적이 없었거든요. 결국, 4학년 고연전 때 2대 0으로 이겼어요. 정말 행복했습니다.”
핀란드 사우나에서 배우고 느끼다
졸업 후 꿈에 그리던 프로 무대에 진출했지만, 출전 기회가 많지 않았다. 2002년 초에는 대표팀에도 뽑혔는데 월드컵 이후 자리를 잡지 못했다. 상무 가기 전까지 3년 동안 주전 키퍼는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기약 없이 기다릴 바에 군대라도 다녀오자 싶었다. 하지만 후보 골키퍼가 필요했던 소속팀은 입대를 계속해서 연기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권 대표는 초조함을 훈련으로 승화시켰다. “오히려 더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킥 훈련같이 부족한 기술 연습을 많이 했어요. 스트레스 받는다고 사람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놀지 않았어요.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기량이 쌓이더라고요.” 그때 죽어라 연습했던 킥이 최장거리 골킥 기록 세울 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며, 사람 일 참 알 수 없다고 권 대표가 웃으면서 말했다.
제대하고 나서는 핀란드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50개 정도의 유럽팀에게 모두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계약이 성사된 팀이었다. 그곳의 시스템과 문화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매주 수요일이면 팀 모두가 연습 대신 사우나에 갔다. 운동량도 한국보다 훨씬 적었다. 낯설고 이상했다.
더 신기한 건 그래도 계속 성과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부상 때문에 1년 정도 쉬었다가 핀란드로 넘어갔었는데 몸이 계속 좋아지는 거예요. 그때 만 31살이었는데, 그 나이에도 아크로바틱한 동작들이 막 나왔어요.” 다리가 부서질 정도로 달리고, 쉬는 시간 거의 없이 훈련했던 한국에서의 나날들. 그게 규율이고 성공하는 길이었다. 쉬어가며 하는 운동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핀란드에서야 깨달았다.
수요일 사우나 맥주 파티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운동에 몰두하는 한국의 선수들과 달리, 핀란드 동료 선수들은 은퇴 후 삶을 이미 준비해오고 있었다. “저보다 두 살 많은 주장은 은행원 자격증이 있대요. 동갑인 중앙수비수 친구는 엔지니어링 자격증이 있다면서, 은퇴하고 공장에서 일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까지 나름 공부도 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코치하면 되겠지’라는 막연한 계획 이외에 은퇴 이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 또래들의 준비된 모습을 보니 더 와 닿았다. 동시에, 선수들의 은퇴 후의 인생에 대한 공적 서비스나 사전 교육이 전혀 없는 한국 시스템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은퇴선수 자립 돕는 ‘스포잇’
그 문제의식은 은퇴선수의 세컨드 라이프를 지원하는 플랫폼 ‘스포잇’ 창업의 밑바탕이 됐다. 41세의 나이로 축구를 그만두자마자 시작한 두 번째 인생인 셈이다. 골대 앞에선 30년 경력의 베테랑이었지만, 창업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였다. 스타트업하는 친구에게 하나하나 배워가며 작년 2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스포잇의 주력 사업은 은퇴선수들의 세컨드 라이프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이었어요. 신선하게 생각해주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지금은 프로축구연맹, 대한축구협회와도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프로축구연맹과는 ‘드림 어시스트’라는 사업을 진행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축구 꿈나무와 은퇴선수들을 연결해 교육자로 자립할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학생 때까지만 선수 생활을 했거나, 프로 또는 실업팀 가서 1년만 있다가 나온 친구들이 제일 어렵거든요. 시스템만 갖추면 다른 일도 잘할 것 같아서 늘 안타까웠어요.”
네트워크 구축 역시 스포잇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젊은 은퇴선수들끼리 서로 대화하며 공감대도 쌓고, 저희 회사 사람들하고도 만나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게 하고 있어요.” 겨우 2년 차라 얼마만큼 영향력이 있을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들이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디딤돌’ 정도만 돼도 좋겠다는 것이 권 대표의 바람이다.
“축구에 관심 없는 분들께 제 이름 말하면 아무도 모르실 거예요. 스타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했던 것 같아요.” 축구화 끈을 묶다가 부상을 당해도 선수 생활이 끝나는 엄혹한 스포츠판이다. 동료 선수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것을 보며 ‘다치지 말고 무사히 마치자’가 너무나 마음속에 중요해졌다. 그렇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새 마흔한 살, 은퇴 적정 나이도 훌쩍 넘었다. 가늘고 길었던 30년 축구 인생, 아쉬움은 남지만 후회는 없다.
“잘 나갈 때는 내일도 계속 보장된 것 같겠죠. 희망을 꺾으려는 건 아니지만, 프로선수로서 성공할 가능성은 정말 낮습니다.” 권 대표에게 인생이란 반짝 타오르고 꺼지는 불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달빛이다. 그러니 인생 길게 보고, 은퇴 후의 삶을 미리 준비하라고 후배 선수들에게 조언한다.
그에게 창업은 또 다른 경기의 시작이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다. “사업을 시작해서 5년 후에도 살아남을 확률이 17%래요. 그래도 제가 몸담았던 곳의 확률보다는 훨씬 높잖아요?”
글│성수민 기자 skycastle@
사진│양태은 기자 aurore@
출처 : 고대신문(http://www.kunews.ac.kr)
【권정혁(신문방송학과 97학번) 스포잇 대표 인터뷰】
공부욕심 있는 운동선수
핀란드에서 제2의 인생 찾아
은퇴선수 자립에 디딤돌 되고파
권정혁 대표는 "젊은 은퇴선수들이 사회에 적응하는데 도움을 주고싶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 축구선수가 프로선수로 뛸 확률은 0.8%. 그중에서도 주전을 차지할 확률은 0.18%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학생선수로 훈련받는 선수들 대부분은 그라운드 바깥의 삶을 준비하지 못한다. 젊은 나이에 은퇴한 선수들이 대개 구직에 어려움을 겪는 게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현주소다.
이 문제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있다. 한국 최초의 유럽 무대 진출 골키퍼이자, K리그 최초의 골키퍼 필드골과 역대 최장거리 골 기록 보유자, 권정혁 교우다. 그는 은퇴선수들의 자립을 돕는 스타트업 ‘스포잇’의 대표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유니폼을 벗은 축구선수가 그라운드를 떠나 창업을 택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축구장, 강의실, 도서관, 다시 축구장
“제가 좀 독특했어요. 아마 축구부에서 저만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대학 시절 그의 하루는 늘 두 배로 빽빽했다. 새벽공기 마시면서 달리고, 1교시부터 강의 듣고, 오후에 도서관 가서 과제하고, 밤에 돌아가서 운동하면 다시 별이 보이는 새벽이었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즐거웠어요. 그땐 젊어서 에너지가 넘쳤으니까.”
체육교육과가 아닌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한 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운동선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다른 공부도 좀 열심히 해놓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신방과는 영어와 수학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서 그나마 쉽게 따라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현실은 냉정했다. 청소년 대표로 뛰었던 새내기 시절엔 점수가 바닥을 쳤다. 오기가 생겼다. 레포트 쓰는 법을 익히고, 무작정 하던 시험공부도 더 철저하게 준비했다. 조금씩 따라붙던 학점은 4학년 1학기 때 3점 초중반의 성적까지 찍었다. 운동과 학업을 병행한 것 치고는 굉장한 성과였다. 짜릿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연전 승리가 주는 뿌듯함은 성적 상승 그 이상이었다. 2000년 고연전은 그의 축구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다. “연세대한테 세 번 연속으로 졌어요. 1학년 때는 경기를 못 뛰었고, 2, 3학년 때는 경기를 뛰었는데 다 진 거예요. 그때는 정말 ‘이번에도 지면 안 된다’면서 마음 졸이며 준비했던 것 같아요. 30년 동안 축구를 했지만, 그 경기만큼 긴장됐던 적이 없었거든요. 결국, 4학년 고연전 때 2대 0으로 이겼어요. 정말 행복했습니다.”
핀란드 사우나에서 배우고 느끼다
졸업 후 꿈에 그리던 프로 무대에 진출했지만, 출전 기회가 많지 않았다. 2002년 초에는 대표팀에도 뽑혔는데 월드컵 이후 자리를 잡지 못했다. 상무 가기 전까지 3년 동안 주전 키퍼는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기약 없이 기다릴 바에 군대라도 다녀오자 싶었다. 하지만 후보 골키퍼가 필요했던 소속팀은 입대를 계속해서 연기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권 대표는 초조함을 훈련으로 승화시켰다. “오히려 더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킥 훈련같이 부족한 기술 연습을 많이 했어요. 스트레스 받는다고 사람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놀지 않았어요.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기량이 쌓이더라고요.” 그때 죽어라 연습했던 킥이 최장거리 골킥 기록 세울 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며, 사람 일 참 알 수 없다고 권 대표가 웃으면서 말했다.
제대하고 나서는 핀란드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50개 정도의 유럽팀에게 모두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계약이 성사된 팀이었다. 그곳의 시스템과 문화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매주 수요일이면 팀 모두가 연습 대신 사우나에 갔다. 운동량도 한국보다 훨씬 적었다. 낯설고 이상했다.
더 신기한 건 그래도 계속 성과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부상 때문에 1년 정도 쉬었다가 핀란드로 넘어갔었는데 몸이 계속 좋아지는 거예요. 그때 만 31살이었는데, 그 나이에도 아크로바틱한 동작들이 막 나왔어요.” 다리가 부서질 정도로 달리고, 쉬는 시간 거의 없이 훈련했던 한국에서의 나날들. 그게 규율이고 성공하는 길이었다. 쉬어가며 하는 운동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핀란드에서야 깨달았다.
수요일 사우나 맥주 파티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운동에 몰두하는 한국의 선수들과 달리, 핀란드 동료 선수들은 은퇴 후 삶을 이미 준비해오고 있었다. “저보다 두 살 많은 주장은 은행원 자격증이 있대요. 동갑인 중앙수비수 친구는 엔지니어링 자격증이 있다면서, 은퇴하고 공장에서 일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까지 나름 공부도 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코치하면 되겠지’라는 막연한 계획 이외에 은퇴 이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 또래들의 준비된 모습을 보니 더 와 닿았다. 동시에, 선수들의 은퇴 후의 인생에 대한 공적 서비스나 사전 교육이 전혀 없는 한국 시스템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은퇴선수 자립 돕는 ‘스포잇’
그 문제의식은 은퇴선수의 세컨드 라이프를 지원하는 플랫폼 ‘스포잇’ 창업의 밑바탕이 됐다. 41세의 나이로 축구를 그만두자마자 시작한 두 번째 인생인 셈이다. 골대 앞에선 30년 경력의 베테랑이었지만, 창업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였다. 스타트업하는 친구에게 하나하나 배워가며 작년 2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스포잇의 주력 사업은 은퇴선수들의 세컨드 라이프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이었어요. 신선하게 생각해주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지금은 프로축구연맹, 대한축구협회와도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프로축구연맹과는 ‘드림 어시스트’라는 사업을 진행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축구 꿈나무와 은퇴선수들을 연결해 교육자로 자립할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학생 때까지만 선수 생활을 했거나, 프로 또는 실업팀 가서 1년만 있다가 나온 친구들이 제일 어렵거든요. 시스템만 갖추면 다른 일도 잘할 것 같아서 늘 안타까웠어요.”
네트워크 구축 역시 스포잇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젊은 은퇴선수들끼리 서로 대화하며 공감대도 쌓고, 저희 회사 사람들하고도 만나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게 하고 있어요.” 겨우 2년 차라 얼마만큼 영향력이 있을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들이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디딤돌’ 정도만 돼도 좋겠다는 것이 권 대표의 바람이다.
“축구에 관심 없는 분들께 제 이름 말하면 아무도 모르실 거예요. 스타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했던 것 같아요.” 축구화 끈을 묶다가 부상을 당해도 선수 생활이 끝나는 엄혹한 스포츠판이다. 동료 선수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것을 보며 ‘다치지 말고 무사히 마치자’가 너무나 마음속에 중요해졌다. 그렇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새 마흔한 살, 은퇴 적정 나이도 훌쩍 넘었다. 가늘고 길었던 30년 축구 인생, 아쉬움은 남지만 후회는 없다.
“잘 나갈 때는 내일도 계속 보장된 것 같겠죠. 희망을 꺾으려는 건 아니지만, 프로선수로서 성공할 가능성은 정말 낮습니다.” 권 대표에게 인생이란 반짝 타오르고 꺼지는 불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달빛이다. 그러니 인생 길게 보고, 은퇴 후의 삶을 미리 준비하라고 후배 선수들에게 조언한다.
그에게 창업은 또 다른 경기의 시작이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다. “사업을 시작해서 5년 후에도 살아남을 확률이 17%래요. 그래도 제가 몸담았던 곳의 확률보다는 훨씬 높잖아요?”
글│성수민 기자 skycastle@
사진│양태은 기자 aurore@
출처 : 고대신문(http://www.kunew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