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호 유럽 진출 골키퍼' 권정혁, 무한도전의 삶을 디자인하다'
[SPORTS KU= 글 유승완 기자, 사진 박채원, 박종수 기자/ 인천유나이티드, 권정혁 본인 제공] 삶은 여러가지 '해프닝'의 연속과도 같다. 상상한 적 없던 일이 갑자기 일어나기도 하고, 별 뜻 없이 시작했던 무언가가 나중에는 큰 결과물로 돌아오기도 한다. 권정혁(신방97)의 삶도 그랬다. 골킥을 잘 차지 못해 습관처럼 해온 킥 연습은 결국 84m를 날아가 골이 됐고, 위성 TV로 호나우두의 플레이를 보며 가진 막연한 동경은 10여 년 후 유럽에서의 러브콜로 돌아왔다. 그라운드를 떠나, 이제는 '스타트업 대표'라는 이름의 삶에 도전하고 있는 권정혁의 이야기를 SPORTS KU가 들어봤다.
<권정혁 Profile>
생년월일: 1978년 8월 2일
출신학교: 부평초 - 부평동중 - 부평고 - 고려대
포지션: 골키퍼
프로경력: 울산현대(2001-2004) - 광주상무(2004-2006) - 포항스틸러스(2006-2007) - FC서울(2008) - 로바니에멘팔로세우라(핀란드, 2009) - VPS바사(핀란드, 2010) - 인천유나이티드(2011-2014) - 광주FC(2015) - 부천FC1995(2016) - 경남FC(2016) - FC의정부 (2017-2018)
■ 태생부터 골키퍼, '탄탄대로'를 걸었던 학창 시절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스포츠다. 그만큼 골 넣는 공격수가 가장 주목받기 마련이고 골을 '막는' 골키퍼는 냉정히 말해 인기 포지션이라고 보기 힘들다. 실제로 이전에는 다른 포지션을 소화하다가, 팀의 상황이나 경쟁을 위해 골키퍼로 전향하는 사례도 꽤 많았다. 하지만 권정혁은 처음 축구를 접할 때부터 골키퍼로 시작해, 선수 은퇴를 선언하기 까지 축구 인생 내내 골문을 지켰다.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골키퍼였습니다. 사실 어릴 때는 축구를 할 생각이 없었어요. 코치님의 권유에도 축구를 안 한다고 했는데, 4학년 때 축구부만 모아놓은 반에 제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걸 보고 밤새 울기도 했죠(웃음). 당시 부모님이 '왜 하기 싫어하는 애를 자꾸 시키려고 하냐'고 따지시니까 감독님이 제게 '딱 하루만 해보고 재미없으면 하지 마라'고 하셨어요. 근데 또 해보니까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 뒤로 그만둔 적 없이 딱 30년을 골키퍼로 뛰었네요."
그 후 축구 명문 부평동중, 부평고를 거치며 권정혁은 팀의 주전 골키퍼로서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특히 부평고 시절에는 꾸준히 청소년 대표로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등, 주목받는 골키퍼 유망주로서 희망찬 미래만이 기다리는 듯했다.
"돌아보면 학창 시절 좋은 지도자분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감독님이 특히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게, 당시 저를 비롯해 김남일(성남FC 감독) 선배처럼 청소년 대표, 나중엔 프로에 진출헀던 사람들이 대부분 초등학교 때 포지션 그대로 선수 생활을 했거든요. 그 후 부평고 시절엔 자신감이 굉장히 높았어요. 1학년 때는 전국체전에서, 2학년 때도 전국대회에서 우승했거든요. 청소년 대표 때도 주전은 아니지만 한 학년 월반해 선발됐고요. 그러다 보니 그때는 '난 당연히 선수로서 잘되겠지' 생각헀던 것 같아요. 당연히 국가대표, 프로 선수가 될 줄 알았죠. 그 뒤가 얼마나 험난한지는 모르고 (웃음)."
■ 고려대 '황금세대'의 일원,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다
부평고 2학년 때 전국대회를 우승한 이후 이미 고려대로의 진학이 결정된 상황, 고대하던 입학을 앞두고 권정혁은 보통의 체육특기자 학생들과는 다르게 체육교육학과가 아닌 신문방송학과로의 진학을 결정한다. 조금은 다른 선택이었다.
"고려대 입학이 결정되고 나서, 과를 결정해야하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친척 중에 기자님이 계셨는데, 신방과로 가면 영어나 수학은 몰라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나름대로 언어 영역은 수능에서도 점수가 높아서(웃음). 부모님도 그렇고 저도 대학교에 가면 공부를 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체육특기자 학생들이 자유롭게 과를 선택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고려대 1학년 시절에도 청소년 대표로 뽑히며 선수로서 '장미빛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권정혁은 현재가 미래의 성공을 반드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님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C제로 룰'은 상상도 못 할 시절, 하루 내내 운동만 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헀을 당시의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공부에도 손을 놓지 않은 것이다. 신방과 특성상 일반 학생들과 똑같은 수업을 들어야 해 힘들었지만, 없는 시간을 쪼개 공부한 결과 4학년 때는 3점대 학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1학년 1학기 때만 해도 학사 경고를 받기도 했어요(웃음). 대표팀에 차출되면서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1학년 2학기때부터는 수업을 거의 다 들었던 것 같네요. 그전까지 공부하던 사람이 아니라 많이 부족했어요. 나중에는 수업만 들어서는 따라가기가 힘드니까 학기 초부터 미리 수업 교재나 필요한 도서를 읽어두고 갔어요. 레포트도 거의 다 제출했고요. 하지만 당시엔 단 좋게 보는 시선도 있었어요. '운동선수가 왜 공부를 하냐' 하고, 축구부 내에서도 감독님은 좋아하셨는데, 선배들은 안 좋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셨던 것 같아요. 물론 꿈은 크게 꾸는 게 좋지만, 선수라는 게 언제 다쳐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고려대에 와서도 운동을 관두는 사람이 태반인데, 현실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놓는 게 살아가는 데에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또 대학 시절 아니면 언제 또 공부를 할 수 있겠어요.
당시 고려대 축구부는 그야말로 '황금세대'의 라인업을 자랑하는 강팀이었다. 박동혁(체교96, 충남아산 감독), 박진섭(체교96, 광주FC 감독), 차두리 (신방99, 오산고 감독) 등 내로라하는 유망주들이 가득한 가운데, 권정혁도 주전 골키퍼로서 당당히 대학선수권 대회 2연패를 함께하며 이름을 남겼다. 어디 축구부뿐이었을까. 가히 대학 스포츠, 그리고 고려대 운동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90년대다. 당시 고려대 선수들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졌다. 고려대 시절 기억에 남는 일화나 추억이 있냐는 지물에 권정혁은 미소를 보이더니 잠시 과거로 떠났다.
"처음 숙소에 가는 날이었어요. 이름만 듣고 고려대 축구부 숙소라고 하니까 완전히 기대에 부풀었죠. 숙소에 딱 도착을 했는데, 가자마자 쥐가 나오는 거예요(웃음). 당시엔 숙소가 지금의 녹지가 아니라 이공계 캠퍼스 쪽에 있었거든요. 시설도 열악했고, 심지어 세탁기도 없었을 때니까요. 축구부도 축구부지만, 야구부 선수들이 빨래를 참 많이 했어요. 최희섭(법학98, KIA 타이거즈 코치) 선수도 야간 운동을 하다 와서는 선배들 빨래를 12시까지 하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아, 제가 키가 크다 보니 농구부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웃음). 유독 현주엽(경영94) 형이 제게 짓궃게 장난도 많이 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프로 생활할 때 호텔 등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그때 이야기도 하고 그랬죠.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5개 운동부 선수들끼리 교류가 꽤 많은 편이었던 것 같아요.“
■ '히딩크호 멤버', 하지만 프로에서는 줄곧 '세컨드 골키퍼'
고려대 졸업 후 울산에 입단한 권정혁은 2002년 초 월드컵을 앞둔 히딩크호에도 선발, 북중미 골드컵 명단에도 이름을 올릴 만큼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어떤 팀에든 단 한 명의 자리밖에 없는 주전 골키퍼의 자리는 가깝고도 먼 꿈이었다. 그해 신인임을 감안하면 10경기를 넘게 소화하며 나름의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이내 후보로 밀려나야 했고, 상무 전역 후에는 정성룡(가와사키)과 신화용이 버티는 포항스틸러스, 이후에는 김호준(체교03, 부산아이파크), 김병지 등 쟁쟁한 골키퍼 진을 보유한 FC서울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처음 울산에서는 김병지 선배의 이적 이후 경쟁 구도였기 때문에 제게도 기회가 좀 왔어요. 2002년도에는 국가대표 B팀에는 계속 선발되면서 미국에서 열린 골드컵도 다녀왔고요, 생각해보면 그때가 정점이었고, 이후로 계속 내리막길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죠. 소속팀이 계속 잘했으니 선수로서 승승장구하며 프로, 국가대표까지 했지만, 어떻게 보면 당시엔 아직 기량이나 내실이 선수로서 미완성이었던 것 같아요. 또 그렇다고 팀에 아예 필요가 없는 선수는 아닌 애매한 상황이라 더 힘들었죠. 두 번째, 세 번째 골키퍼는 항상 필요하니까요."
팀의 '세컨드 골키퍼'로서 스쿼드를 해우기만 하는 생활이 계속되면, 자연히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전 골키퍼의 부상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출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에, 상황에 안주하거나 무력감에 빠지기도 쉽다. 하지만 권정혁은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해결책과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경기를 뛰진 못했지만, 그 시절 계속 기본기를 익히면서 선수로서 '내실'을 쌓고자 노력한 것 같아요. 제가 부족했던 부분도 채울 수 있었고요. 좀 웃긴 얘기 같을 수도 있지만, 제가 골키퍼인데도 킥을 잘 못 찼어요. 폼도 엉성하고 90년대까지만 해도 스위퍼가 골키퍼 대신 골킥을 차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거든요. 안 해 버릇하면 발전이 없다고, 그래서 그때 킥 연습을 참 많이 했어요. 훈련 후에 항상 2~30분씩 남아서 혼자 킥 연습을 하는 게 루틴이 돼버릴 정도였으니까요.“
어릴 적 위성중계로 유럽리그 경기를 보며 막연히 소망했던 '해외 진출'의 꿈을 권정혁이 조금씩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고려대 시절부터 익힌 영어에 대해, 프로 진출 후 포르투갈어까지 익히는 등 언어와 문화에 대해 감각을 습득하기도 했다.
"영어 같은 경우는 대학 시절 '실용 영어' 라는 과목을 4학년 때 까지 계속 재수강을 하면서 익혔어요. 학원을 갈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수강한다고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골드컵 당시 미국에 있다가 우루과이에 들렀어요. 미국에서 몇 마디 하다 보니 '영어를 할 줄 아는게 중요하구나' 느꼈는데, 또 우루과이에서 영어가 안 통하고 스페인어를 쓰는 거 있죠? 당시 히딩크 감독님께서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도 정말 유창하게 잘하셨어요. 그걸 보고선 저도 한국에 돌아와서는 경기를 뛰는 것도 아니겠다. 여유가 좀 있으니 브라질 친구들이랑 친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포르투갈어를 배운 것 같아요. 제가 하나를 말하면 그 친구들이 반대말을 알려주고 하는 식으로 금방 배웠어요. 나중에는 놀러 갈 일 있으면 통역이랑 저를 함께 부를 정도였죠."
■ 위기 끝 얻은 기회, 한국 최초의 ' 유럽파 골키퍼'가 되다.
상무 전역 이후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던 권정혁은 FC서울 이적 이후 에이전트를 통해 본격적으로 팀을 찾았다. 약 50여 개 팀과 접촉이 있었고,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눈 건 10팀 내외였다. 여름과 겨울 이적 시장 기간 계속 시도한 끝에 마침내 향하게 된 곳은 핀란드 1부 리그 소속의 로바니에멘 팔로세우라. '한국 최초의 유럽파 골키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쉽게 팀이 구해지진 않았어요. 하지만 이적 시장에서 제가 파는 상품을 저 하나기 때문에, 수많은 기회 중 딱 한 번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죠."
골키퍼는 팀원들과의 소통이 매우 중요한 포지션이다. 수비진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라인을 유지하고 상대 공격수를 견제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언어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권정혁 이후에도 유럽에 진출한 골키퍼가 많지 않았던 이유이다.
"핀란드에선 웬만하면 다들 영어를 잘하거든요. 다만 처음 갔을 때는 심리적으로, 혹은 팀 분위기에 적응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때 한국에서 배워둔 포르투갈어가 도움이 됐죠. 팀원 중에 브라질 선수가 딱 한 명 있었거든요. 저와 동갑이기도 해 친하게 지냈는데, 그 친구는 제가 포르투갈어를 하니까 거의 '동포'같은 느낌이었나 봐요(웃음). 생활면에서나, 팀 분위기에 적응하는 데 참 도움을 많이 줬죠."
기회를 찾아 핀란드로 왔지만, 경쟁은 불가피했다. 처음엔 들쭉날쭉 출장 기회를 얻은 권정혁은, 잠깐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내 주전 골키퍼의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리그 하위권 팀이었던 팔로세우라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중위권 팀 VPS바사로 이적한 뒤, 2010년에는 '리그 베스트11'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헀다. 그야말로 '반전 드라마'를 쓴 시기였다.
"처음에 (핀란드)로 갔을 때는, 감독님이 절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그때는 경기를 잘 못 뛰었죠. 이후에 수석코치님이 팀을 맡으셨는데, 훈련 때 열심히 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셨나 봐요 그때부터 한 시즌 내내 주전으로 뛰기 시작헀죠. 경기에 계속 나서다 보니까 자신감이 생기고, 경기 운영에 대한 감각도 점점 찾을 수 있게 됐어요."
권정혁이 핀란드에서 얻은 것은 출장 기회만이 아니었다. 리그에서 활약하는 핀란드 선수들이 은퇴 이의 인생계획을 대부분 세워놓고 준비하는 것을 보며, 권정혁은 자신을 비롯한 한국의 축구선수들이 은퇴 이후의 삶에서 겪는 어려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선수 생활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거든요. (핀란드에서 뛸 때) 동료들은 다들 계획이 있었어요. 당시 주장은 은행원 자격증을, 중앙 수비를 보던 친구는 엔지니어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죠. 유럽에서는 그게 흔한 일이라고 하더라구요. 운동하면서도 미래의 계획을 함께 세울 수가 있는데, 한국에선 '운동을 하면 운동에만 집중하라'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운동을 24시간 내내 한다고 실력 또한 끝없이 느는 건 아닐 텐데 말이죠."
2년 동안의 핀란드 리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K리그, 권정혁이 향한 곳은 고향 팀 인천유나이티드였다. 익숙한 도시, 환경에 더해 유럽 무대에서 얻은 경험과 발전한 기량으로 권정혁은 K리그 데뷔 후 약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붙박이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인천의 판 데르 사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실 유럽에서 더 오래 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실제로 스웨덴 팀과 얘기가 오갔었는데, 계약상의 문제로 다시 한국에 돌아오겠다고 결정하게 된 거죠. 당시 인천 허정무(연세대74,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 감독님이 제 경력을 높게 평가해주신 것 같아요. 고향이기도 한 만큼 제 마음도 편하고,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죠."
약 4년 간의 인천 생활 동안, 권정혁이 가장 빛났던 때는 바로 2013시즌이었다. 35세의 나이로 시즌 내내 맹활약을 펼친 끝에, 그해 유일하게 전 경기, 전 시간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화룡정점은 그해 7월 열린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원정 경기였다. 자기 진영에서 멀리 찬 공이 그대로 상대 골키퍼를 넘겨 선제골을 기록하게 된 것. 이는 30년이 넘는 K리그 역사에서 골키퍼가 기록한 첫 필드골이었고, 아직가지 K리그 역대 최장 거리 (84m) 골로 남아 있다.
"저는 그 골이 그저 '해프닝'이었다고 생각해요. 경기에 나서면 50번에서 100번의 터치를 할 수 있는데, 그 수많은 터치 중 한 번이었을 뿐인 거죠. 말하자면 '럭키샷' 같은 거에요. 그런데 약간 아이러니하기도 해요. 전 프로에 가서야 킥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었으니까. 킥에 대한 결핍이 있어서 계속 훈련을 했던 거고, 그러다 보니 제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킥이 어느 순간 최장 거리 골로 연결된 거잖아요? 지금도 많은 분이 그 골로 저를 기억 해주시고요."
인천에서의 활약 이후,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 된 권정혁은 이후 광주, 부천, 경남 등을 거쳐 K3리그 의정부FC에서 플레잉코치로 활동한 이후 약 16년간 지속한 오랜 선수 커리어의 종지부를 찍었다. 자칭 '가늘고 긴' 선수 생활의 마무리였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오래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 월드컵을 보는데, 잉글랜드의 피터 쉴튼이 마흔 살이 넘어서도 대표팀 골문을 지키는 게 인상적이었거든요. 사실 제가 프로 처음 갈 때만 해도 서른 넘으면 노장이었고, 30대 중반까지 선수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어요. 저 같은 경우는 그래도 선수를 오래 하는 동안 천천히 내려오면서 은퇴 후의 준비도 차근차근히 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 이제는 '스타트업 대표'로, 새로운 삶을 디자인하다
선수 은퇴 이후 권정혁이 선택한 길은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 창업. 대부분의 프로 출신 은퇴 선수들이 지도자, 혹은 단순한 자영업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음을 고려하면 의외의 선택이었다.
"핀란드에 있을 때부터 방향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에 있을 때 중요한 건 '운동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이었거든요. 이게 좋을 수도 있는데, 그 뒤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거죠. 선수들도 그런 마음가짐이 체화되다 보니, 그 뒤에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식 자체가 잘 없어요. 그런데 외국 선수들을 보면서 느끼고 생각한 점은, 은퇴 후에도 축구와 관련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거였어요.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딱 특정한 아이템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내가 하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생기겠지'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어요"
' 선수 이후의 삶"에 대한 깊은 고민과 준비 덕분이었을까. 권정혁이 현재 진행 중인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는 은퇴 선수와 축구를 배우고 싶은 일반인을 연결해주는 플랫폼 기반의 서비스다.
"여러 가지 준비를 하다 보니 은퇴 선수 문제가 생각보다 크다고 느꼈어요. 저는 할 만큼 하고 끝냈지만, 프로에서 1, 2년 있다 그만 두는 선수도 많고, 대학교 때 운동을 접는 선수도 참 많아요. 그래서 이 선수들이 시간 날 때 와서 일반인 분들께 축구를 가르쳐주고, '알바'처럼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생각해본 거죠."
권정혁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일단은 살아남는 게 목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최대한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에요. 그러다 안되는 것은 안 하면 되고, 잘 되는 건 계속하면 되는 거죠. 프로젝트를 시작해 진행하다 보면 그게 생각지도 못하게 다른 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수익도 자연스럽게 생기고. '꼭 이걸 해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저의 경력, 저희 팀원들의 배경에 맞는 일 중 여러가지를 시도해보고 싶어요."
권정혁이 이뤄낸 것은 과거의 자신이 차근차근 만들어온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해프닝'이었다. 매일 킥 연습에 투자한 20분은 골키퍼가 평생 한 번을 넣어볼까 말까 한 멋진 골로 돌아왔고, 유럽 축구를 향한 막연한 동경으로 들었던 영어 수업은 결국 최초의 유럽 리그 골키퍼 개척자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미래에 대한 고민들 아끼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미래는 결국 현재에 집중하는 것으로 얻는 것임을 보여준 그에게 마지막 고려대 축구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을 부탁했다.
"일방적으로 '내가 걸어온 길이 맞다.'고 말하는 건 좀 위험한 생각 같아요. 다만 프로 선수가 되는 길이 참 좁잖아요. 대학 생활이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서 스케줄 된 삶일 텐데, 가끔은 당신의 삶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우리 삶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이 긴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내면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게 없다면 남들의 조언은 의미가 없는 셈이죠. 결국 본인에게 맞는 방향을 고민하고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제는 축구 선수가 아닌, 한 회사의 대표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인생의 제2막, 권정혁은 유럽 리그 진출 직후의 자신이 그랬듯 다시금 '도전자'의 입장에 놓였다. 30년 동안 골대를 지키면서 쉴 새 없이 디자인해온 그라운드 밖 권정혁의 삶이 어떤 문양과 색깔로 장식됐을지는, 앞으로 보여줄 그의 도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승완 기자
Copyright ⓒ 고려대학교 스포츠 매거진 KU
기사제공 고려대학교 스포츠 매거진 KU
'한국 1호 유럽 진출 골키퍼' 권정혁, 무한도전의 삶을 디자인하다'
[SPORTS KU= 글 유승완 기자, 사진 박채원, 박종수 기자/ 인천유나이티드, 권정혁 본인 제공] 삶은 여러가지 '해프닝'의 연속과도 같다. 상상한 적 없던 일이 갑자기 일어나기도 하고, 별 뜻 없이 시작했던 무언가가 나중에는 큰 결과물로 돌아오기도 한다. 권정혁(신방97)의 삶도 그랬다. 골킥을 잘 차지 못해 습관처럼 해온 킥 연습은 결국 84m를 날아가 골이 됐고, 위성 TV로 호나우두의 플레이를 보며 가진 막연한 동경은 10여 년 후 유럽에서의 러브콜로 돌아왔다. 그라운드를 떠나, 이제는 '스타트업 대표'라는 이름의 삶에 도전하고 있는 권정혁의 이야기를 SPORTS KU가 들어봤다.
<권정혁 Profile>
생년월일: 1978년 8월 2일
출신학교: 부평초 - 부평동중 - 부평고 - 고려대
포지션: 골키퍼
프로경력: 울산현대(2001-2004) - 광주상무(2004-2006) - 포항스틸러스(2006-2007) - FC서울(2008) - 로바니에멘팔로세우라(핀란드, 2009) - VPS바사(핀란드, 2010) - 인천유나이티드(2011-2014) - 광주FC(2015) - 부천FC1995(2016) - 경남FC(2016) - FC의정부 (2017-2018)
■ 태생부터 골키퍼, '탄탄대로'를 걸었던 학창 시절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스포츠다. 그만큼 골 넣는 공격수가 가장 주목받기 마련이고 골을 '막는' 골키퍼는 냉정히 말해 인기 포지션이라고 보기 힘들다. 실제로 이전에는 다른 포지션을 소화하다가, 팀의 상황이나 경쟁을 위해 골키퍼로 전향하는 사례도 꽤 많았다. 하지만 권정혁은 처음 축구를 접할 때부터 골키퍼로 시작해, 선수 은퇴를 선언하기 까지 축구 인생 내내 골문을 지켰다.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골키퍼였습니다. 사실 어릴 때는 축구를 할 생각이 없었어요. 코치님의 권유에도 축구를 안 한다고 했는데, 4학년 때 축구부만 모아놓은 반에 제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걸 보고 밤새 울기도 했죠(웃음). 당시 부모님이 '왜 하기 싫어하는 애를 자꾸 시키려고 하냐'고 따지시니까 감독님이 제게 '딱 하루만 해보고 재미없으면 하지 마라'고 하셨어요. 근데 또 해보니까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 뒤로 그만둔 적 없이 딱 30년을 골키퍼로 뛰었네요."
그 후 축구 명문 부평동중, 부평고를 거치며 권정혁은 팀의 주전 골키퍼로서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특히 부평고 시절에는 꾸준히 청소년 대표로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등, 주목받는 골키퍼 유망주로서 희망찬 미래만이 기다리는 듯했다.
"돌아보면 학창 시절 좋은 지도자분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감독님이 특히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게, 당시 저를 비롯해 김남일(성남FC 감독) 선배처럼 청소년 대표, 나중엔 프로에 진출헀던 사람들이 대부분 초등학교 때 포지션 그대로 선수 생활을 했거든요. 그 후 부평고 시절엔 자신감이 굉장히 높았어요. 1학년 때는 전국체전에서, 2학년 때도 전국대회에서 우승했거든요. 청소년 대표 때도 주전은 아니지만 한 학년 월반해 선발됐고요. 그러다 보니 그때는 '난 당연히 선수로서 잘되겠지' 생각헀던 것 같아요. 당연히 국가대표, 프로 선수가 될 줄 알았죠. 그 뒤가 얼마나 험난한지는 모르고 (웃음)."
■ 고려대 '황금세대'의 일원,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다
부평고 2학년 때 전국대회를 우승한 이후 이미 고려대로의 진학이 결정된 상황, 고대하던 입학을 앞두고 권정혁은 보통의 체육특기자 학생들과는 다르게 체육교육학과가 아닌 신문방송학과로의 진학을 결정한다. 조금은 다른 선택이었다.
"고려대 입학이 결정되고 나서, 과를 결정해야하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친척 중에 기자님이 계셨는데, 신방과로 가면 영어나 수학은 몰라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나름대로 언어 영역은 수능에서도 점수가 높아서(웃음). 부모님도 그렇고 저도 대학교에 가면 공부를 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체육특기자 학생들이 자유롭게 과를 선택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고려대 1학년 시절에도 청소년 대표로 뽑히며 선수로서 '장미빛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권정혁은 현재가 미래의 성공을 반드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님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C제로 룰'은 상상도 못 할 시절, 하루 내내 운동만 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헀을 당시의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공부에도 손을 놓지 않은 것이다. 신방과 특성상 일반 학생들과 똑같은 수업을 들어야 해 힘들었지만, 없는 시간을 쪼개 공부한 결과 4학년 때는 3점대 학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1학년 1학기 때만 해도 학사 경고를 받기도 했어요(웃음). 대표팀에 차출되면서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1학년 2학기때부터는 수업을 거의 다 들었던 것 같네요. 그전까지 공부하던 사람이 아니라 많이 부족했어요. 나중에는 수업만 들어서는 따라가기가 힘드니까 학기 초부터 미리 수업 교재나 필요한 도서를 읽어두고 갔어요. 레포트도 거의 다 제출했고요. 하지만 당시엔 단 좋게 보는 시선도 있었어요. '운동선수가 왜 공부를 하냐' 하고, 축구부 내에서도 감독님은 좋아하셨는데, 선배들은 안 좋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셨던 것 같아요. 물론 꿈은 크게 꾸는 게 좋지만, 선수라는 게 언제 다쳐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고려대에 와서도 운동을 관두는 사람이 태반인데, 현실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놓는 게 살아가는 데에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또 대학 시절 아니면 언제 또 공부를 할 수 있겠어요.
당시 고려대 축구부는 그야말로 '황금세대'의 라인업을 자랑하는 강팀이었다. 박동혁(체교96, 충남아산 감독), 박진섭(체교96, 광주FC 감독), 차두리 (신방99, 오산고 감독) 등 내로라하는 유망주들이 가득한 가운데, 권정혁도 주전 골키퍼로서 당당히 대학선수권 대회 2연패를 함께하며 이름을 남겼다. 어디 축구부뿐이었을까. 가히 대학 스포츠, 그리고 고려대 운동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90년대다. 당시 고려대 선수들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졌다. 고려대 시절 기억에 남는 일화나 추억이 있냐는 지물에 권정혁은 미소를 보이더니 잠시 과거로 떠났다.
"처음 숙소에 가는 날이었어요. 이름만 듣고 고려대 축구부 숙소라고 하니까 완전히 기대에 부풀었죠. 숙소에 딱 도착을 했는데, 가자마자 쥐가 나오는 거예요(웃음). 당시엔 숙소가 지금의 녹지가 아니라 이공계 캠퍼스 쪽에 있었거든요. 시설도 열악했고, 심지어 세탁기도 없었을 때니까요. 축구부도 축구부지만, 야구부 선수들이 빨래를 참 많이 했어요. 최희섭(법학98, KIA 타이거즈 코치) 선수도 야간 운동을 하다 와서는 선배들 빨래를 12시까지 하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아, 제가 키가 크다 보니 농구부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웃음). 유독 현주엽(경영94) 형이 제게 짓궃게 장난도 많이 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프로 생활할 때 호텔 등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그때 이야기도 하고 그랬죠.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5개 운동부 선수들끼리 교류가 꽤 많은 편이었던 것 같아요.“
■ '히딩크호 멤버', 하지만 프로에서는 줄곧 '세컨드 골키퍼'
고려대 졸업 후 울산에 입단한 권정혁은 2002년 초 월드컵을 앞둔 히딩크호에도 선발, 북중미 골드컵 명단에도 이름을 올릴 만큼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어떤 팀에든 단 한 명의 자리밖에 없는 주전 골키퍼의 자리는 가깝고도 먼 꿈이었다. 그해 신인임을 감안하면 10경기를 넘게 소화하며 나름의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이내 후보로 밀려나야 했고, 상무 전역 후에는 정성룡(가와사키)과 신화용이 버티는 포항스틸러스, 이후에는 김호준(체교03, 부산아이파크), 김병지 등 쟁쟁한 골키퍼 진을 보유한 FC서울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처음 울산에서는 김병지 선배의 이적 이후 경쟁 구도였기 때문에 제게도 기회가 좀 왔어요. 2002년도에는 국가대표 B팀에는 계속 선발되면서 미국에서 열린 골드컵도 다녀왔고요, 생각해보면 그때가 정점이었고, 이후로 계속 내리막길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죠. 소속팀이 계속 잘했으니 선수로서 승승장구하며 프로, 국가대표까지 했지만, 어떻게 보면 당시엔 아직 기량이나 내실이 선수로서 미완성이었던 것 같아요. 또 그렇다고 팀에 아예 필요가 없는 선수는 아닌 애매한 상황이라 더 힘들었죠. 두 번째, 세 번째 골키퍼는 항상 필요하니까요."
팀의 '세컨드 골키퍼'로서 스쿼드를 해우기만 하는 생활이 계속되면, 자연히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전 골키퍼의 부상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출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에, 상황에 안주하거나 무력감에 빠지기도 쉽다. 하지만 권정혁은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해결책과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경기를 뛰진 못했지만, 그 시절 계속 기본기를 익히면서 선수로서 '내실'을 쌓고자 노력한 것 같아요. 제가 부족했던 부분도 채울 수 있었고요. 좀 웃긴 얘기 같을 수도 있지만, 제가 골키퍼인데도 킥을 잘 못 찼어요. 폼도 엉성하고 90년대까지만 해도 스위퍼가 골키퍼 대신 골킥을 차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거든요. 안 해 버릇하면 발전이 없다고, 그래서 그때 킥 연습을 참 많이 했어요. 훈련 후에 항상 2~30분씩 남아서 혼자 킥 연습을 하는 게 루틴이 돼버릴 정도였으니까요.“
어릴 적 위성중계로 유럽리그 경기를 보며 막연히 소망했던 '해외 진출'의 꿈을 권정혁이 조금씩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고려대 시절부터 익힌 영어에 대해, 프로 진출 후 포르투갈어까지 익히는 등 언어와 문화에 대해 감각을 습득하기도 했다.
"영어 같은 경우는 대학 시절 '실용 영어' 라는 과목을 4학년 때 까지 계속 재수강을 하면서 익혔어요. 학원을 갈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수강한다고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골드컵 당시 미국에 있다가 우루과이에 들렀어요. 미국에서 몇 마디 하다 보니 '영어를 할 줄 아는게 중요하구나' 느꼈는데, 또 우루과이에서 영어가 안 통하고 스페인어를 쓰는 거 있죠? 당시 히딩크 감독님께서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도 정말 유창하게 잘하셨어요. 그걸 보고선 저도 한국에 돌아와서는 경기를 뛰는 것도 아니겠다. 여유가 좀 있으니 브라질 친구들이랑 친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포르투갈어를 배운 것 같아요. 제가 하나를 말하면 그 친구들이 반대말을 알려주고 하는 식으로 금방 배웠어요. 나중에는 놀러 갈 일 있으면 통역이랑 저를 함께 부를 정도였죠."
■ 위기 끝 얻은 기회, 한국 최초의 ' 유럽파 골키퍼'가 되다.
상무 전역 이후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던 권정혁은 FC서울 이적 이후 에이전트를 통해 본격적으로 팀을 찾았다. 약 50여 개 팀과 접촉이 있었고,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눈 건 10팀 내외였다. 여름과 겨울 이적 시장 기간 계속 시도한 끝에 마침내 향하게 된 곳은 핀란드 1부 리그 소속의 로바니에멘 팔로세우라. '한국 최초의 유럽파 골키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쉽게 팀이 구해지진 않았어요. 하지만 이적 시장에서 제가 파는 상품을 저 하나기 때문에, 수많은 기회 중 딱 한 번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죠."
골키퍼는 팀원들과의 소통이 매우 중요한 포지션이다. 수비진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라인을 유지하고 상대 공격수를 견제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언어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권정혁 이후에도 유럽에 진출한 골키퍼가 많지 않았던 이유이다.
"핀란드에선 웬만하면 다들 영어를 잘하거든요. 다만 처음 갔을 때는 심리적으로, 혹은 팀 분위기에 적응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때 한국에서 배워둔 포르투갈어가 도움이 됐죠. 팀원 중에 브라질 선수가 딱 한 명 있었거든요. 저와 동갑이기도 해 친하게 지냈는데, 그 친구는 제가 포르투갈어를 하니까 거의 '동포'같은 느낌이었나 봐요(웃음). 생활면에서나, 팀 분위기에 적응하는 데 참 도움을 많이 줬죠."
기회를 찾아 핀란드로 왔지만, 경쟁은 불가피했다. 처음엔 들쭉날쭉 출장 기회를 얻은 권정혁은, 잠깐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내 주전 골키퍼의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리그 하위권 팀이었던 팔로세우라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중위권 팀 VPS바사로 이적한 뒤, 2010년에는 '리그 베스트11'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헀다. 그야말로 '반전 드라마'를 쓴 시기였다.
"처음에 (핀란드)로 갔을 때는, 감독님이 절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그때는 경기를 잘 못 뛰었죠. 이후에 수석코치님이 팀을 맡으셨는데, 훈련 때 열심히 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셨나 봐요 그때부터 한 시즌 내내 주전으로 뛰기 시작헀죠. 경기에 계속 나서다 보니까 자신감이 생기고, 경기 운영에 대한 감각도 점점 찾을 수 있게 됐어요."
권정혁이 핀란드에서 얻은 것은 출장 기회만이 아니었다. 리그에서 활약하는 핀란드 선수들이 은퇴 이의 인생계획을 대부분 세워놓고 준비하는 것을 보며, 권정혁은 자신을 비롯한 한국의 축구선수들이 은퇴 이후의 삶에서 겪는 어려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선수 생활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거든요. (핀란드에서 뛸 때) 동료들은 다들 계획이 있었어요. 당시 주장은 은행원 자격증을, 중앙 수비를 보던 친구는 엔지니어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죠. 유럽에서는 그게 흔한 일이라고 하더라구요. 운동하면서도 미래의 계획을 함께 세울 수가 있는데, 한국에선 '운동을 하면 운동에만 집중하라'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운동을 24시간 내내 한다고 실력 또한 끝없이 느는 건 아닐 텐데 말이죠."
2년 동안의 핀란드 리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K리그, 권정혁이 향한 곳은 고향 팀 인천유나이티드였다. 익숙한 도시, 환경에 더해 유럽 무대에서 얻은 경험과 발전한 기량으로 권정혁은 K리그 데뷔 후 약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붙박이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인천의 판 데르 사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실 유럽에서 더 오래 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실제로 스웨덴 팀과 얘기가 오갔었는데, 계약상의 문제로 다시 한국에 돌아오겠다고 결정하게 된 거죠. 당시 인천 허정무(연세대74,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 감독님이 제 경력을 높게 평가해주신 것 같아요. 고향이기도 한 만큼 제 마음도 편하고,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죠."
약 4년 간의 인천 생활 동안, 권정혁이 가장 빛났던 때는 바로 2013시즌이었다. 35세의 나이로 시즌 내내 맹활약을 펼친 끝에, 그해 유일하게 전 경기, 전 시간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화룡정점은 그해 7월 열린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원정 경기였다. 자기 진영에서 멀리 찬 공이 그대로 상대 골키퍼를 넘겨 선제골을 기록하게 된 것. 이는 30년이 넘는 K리그 역사에서 골키퍼가 기록한 첫 필드골이었고, 아직가지 K리그 역대 최장 거리 (84m) 골로 남아 있다.
"저는 그 골이 그저 '해프닝'이었다고 생각해요. 경기에 나서면 50번에서 100번의 터치를 할 수 있는데, 그 수많은 터치 중 한 번이었을 뿐인 거죠. 말하자면 '럭키샷' 같은 거에요. 그런데 약간 아이러니하기도 해요. 전 프로에 가서야 킥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었으니까. 킥에 대한 결핍이 있어서 계속 훈련을 했던 거고, 그러다 보니 제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킥이 어느 순간 최장 거리 골로 연결된 거잖아요? 지금도 많은 분이 그 골로 저를 기억 해주시고요."
인천에서의 활약 이후,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 된 권정혁은 이후 광주, 부천, 경남 등을 거쳐 K3리그 의정부FC에서 플레잉코치로 활동한 이후 약 16년간 지속한 오랜 선수 커리어의 종지부를 찍었다. 자칭 '가늘고 긴' 선수 생활의 마무리였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오래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 월드컵을 보는데, 잉글랜드의 피터 쉴튼이 마흔 살이 넘어서도 대표팀 골문을 지키는 게 인상적이었거든요. 사실 제가 프로 처음 갈 때만 해도 서른 넘으면 노장이었고, 30대 중반까지 선수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어요. 저 같은 경우는 그래도 선수를 오래 하는 동안 천천히 내려오면서 은퇴 후의 준비도 차근차근히 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 이제는 '스타트업 대표'로, 새로운 삶을 디자인하다
선수 은퇴 이후 권정혁이 선택한 길은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 창업. 대부분의 프로 출신 은퇴 선수들이 지도자, 혹은 단순한 자영업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음을 고려하면 의외의 선택이었다.
"핀란드에 있을 때부터 방향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에 있을 때 중요한 건 '운동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이었거든요. 이게 좋을 수도 있는데, 그 뒤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거죠. 선수들도 그런 마음가짐이 체화되다 보니, 그 뒤에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식 자체가 잘 없어요. 그런데 외국 선수들을 보면서 느끼고 생각한 점은, 은퇴 후에도 축구와 관련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거였어요.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딱 특정한 아이템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내가 하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생기겠지'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어요"
' 선수 이후의 삶"에 대한 깊은 고민과 준비 덕분이었을까. 권정혁이 현재 진행 중인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는 은퇴 선수와 축구를 배우고 싶은 일반인을 연결해주는 플랫폼 기반의 서비스다.
"여러 가지 준비를 하다 보니 은퇴 선수 문제가 생각보다 크다고 느꼈어요. 저는 할 만큼 하고 끝냈지만, 프로에서 1, 2년 있다 그만 두는 선수도 많고, 대학교 때 운동을 접는 선수도 참 많아요. 그래서 이 선수들이 시간 날 때 와서 일반인 분들께 축구를 가르쳐주고, '알바'처럼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생각해본 거죠."
권정혁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일단은 살아남는 게 목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최대한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에요. 그러다 안되는 것은 안 하면 되고, 잘 되는 건 계속하면 되는 거죠. 프로젝트를 시작해 진행하다 보면 그게 생각지도 못하게 다른 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수익도 자연스럽게 생기고. '꼭 이걸 해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저의 경력, 저희 팀원들의 배경에 맞는 일 중 여러가지를 시도해보고 싶어요."
권정혁이 이뤄낸 것은 과거의 자신이 차근차근 만들어온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해프닝'이었다. 매일 킥 연습에 투자한 20분은 골키퍼가 평생 한 번을 넣어볼까 말까 한 멋진 골로 돌아왔고, 유럽 축구를 향한 막연한 동경으로 들었던 영어 수업은 결국 최초의 유럽 리그 골키퍼 개척자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미래에 대한 고민들 아끼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미래는 결국 현재에 집중하는 것으로 얻는 것임을 보여준 그에게 마지막 고려대 축구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을 부탁했다.
"일방적으로 '내가 걸어온 길이 맞다.'고 말하는 건 좀 위험한 생각 같아요. 다만 프로 선수가 되는 길이 참 좁잖아요. 대학 생활이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서 스케줄 된 삶일 텐데, 가끔은 당신의 삶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우리 삶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이 긴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내면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게 없다면 남들의 조언은 의미가 없는 셈이죠. 결국 본인에게 맞는 방향을 고민하고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제는 축구 선수가 아닌, 한 회사의 대표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인생의 제2막, 권정혁은 유럽 리그 진출 직후의 자신이 그랬듯 다시금 '도전자'의 입장에 놓였다. 30년 동안 골대를 지키면서 쉴 새 없이 디자인해온 그라운드 밖 권정혁의 삶이 어떤 문양과 색깔로 장식됐을지는, 앞으로 보여줄 그의 도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승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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